지난 8년간 1,000여 개의 브랜드의 스토리를 발굴해 온 국내 최대 브랜드 커뮤니티, 비마이비. 비마이비는 하나의 브랜드를 깊이 다루거나, 하나의 주제를 넓게 다루며 브랜드를 큐레이션하고, 사람을 만나고, 매월 이달의브랜드를 선정합니다.
이번 주의 마이비레터에서는 89년 동안 얼굴 위에 머물러 온 브랜드, 레이밴을 브랜드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남성들이 쓰는 작은 독서용 안경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얇은 메탈 프레임에 투명 렌즈, 더 관능적인 경우엔 무테까지. 라이언 고슬링이 영화 〈프로젝트 헤일 메리〉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마티 슈프림〉에서, 잭 할로우가 앨범 프로모션에서 모두 비슷한 안경을 썼습니다. GQ는 이 트렌드에 'SLRG(Slutty Little Reading Glasses)'라는 이름까지 붙였어요.
SLRG, 알지?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속 라이언 고슬링. 레이밴 아님 아님 아님 / 자료 출처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안경 스타일 하나가 시대의 무드를 드러내는 트렌드는 1900년대부터 계속 되어 왔어요. 1940년대의 거대한 티어드롭 에이비에이터, 1980년대의 두꺼운 검은 웨이페어러, 그리고 지금의 깃털 같은 메탈 프레임까지. 이를 이끌어 온 한 브랜드는 선글라스와 안경을 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 없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만들어 왔는데요. 그 주인공은 바로 레이밴입니다.
1937년 미군 조종사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89년이 지난 지금은 메타와 함께 AI 안경 시장의 1위에 올라 있는 브랜드. 단종 직전이던 브랜드를 톰 크루즈가 영화 한 편으로 단종 살려내는 우여곡절의 스토리도 있어요. 세대를 막론하고 선글라스의 근본으로 꼽히는 89살 브랜드. 이 브랜드가 시대를 타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01 광선, 아웃
레이밴을 직역하면 '광선을 막다(Ban Rays)'입니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가 브랜드의 네임에 담긴 셈이죠. 1929년, 미 육군 항공대의 존 매크리디 대령은 뉴욕 로체스터에 자리한 의료기기 제조사 보슈앤롬(Bausch & Lomb)에 항공 선글라스 개발을 의뢰합니다. 새로운 비행기들이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게 되면서 조종사들이 강한 햇빛으로 인한 두통과 고도병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하늘을 가르는 파일럿들에게 시야 확보는 곧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일상으로 들어온 초록색 렌즈 / 자료 출처 레이밴
보슈앤롬은 1936년 플라스틱 프레임에 녹색 렌즈를 더한 'Anti-Glare' 시제품을 만들었고, 1937년 일반 대중에게도 선보였습니다. 이듬해엔 메탈 프레임으로 재설계해 'Ray-Ban Aviator'라는 이름을 얻었죠. 이 안경이 시대의 헤리티지를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은 1944년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해변에 상륙하면서 레이밴 에이비에이터를 쓴 모습이 사진에 담겼고, 이 이미지는 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자 시대의 표정이 되었어요.
브랜드가 헤리티지를 갖고 상징이 되는 일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곤 해요. 필요에 따라 태어난 발명품이 영광의 순간(혹은 셀럽의 일상)에 묻고, 대중이 그 영광과 셀럽에 대한 동경을 브랜드에 투영하는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시장에는 군용 잉여 레이밴 에이비에이터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그 안경과 자유와 승리를 동일시 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89년에 걸친 레이밴 브랜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어요.
레이밴의 아이콘들 / 자료 출처 레이밴
특히 우리나라에선 아시아인들의 얼굴형에도 잘 어울리는 에이비에이터 모델 자체는 ‘레이방’이라고 불리며 선글라스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87년 룩소티카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이래 에실로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신세계백화점을 비롯한 주요 백화점, 안경원 체인, 공식 온라인몰을 통해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어요.
02 매버릭의 ‘그’ 선글라스
1950년대와 60년대을 지나며 레이밴은 제임스 딘과 오드리 헵번의 인기까지 얻었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81년, 한 해동안 레이밴은 웨이페어러 모델을 단 18,000개밖에 팔지 못했고, 단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대에 뒤처진 디자인이 되어 가고 있던 거예요.
마이클 잭슨과 오드리 햅번도 쓴 레이밴 / 자료 출처 레이밴
레이밴은 필승 카드를 꺼냅니다. 캘리포니아 버뱅크의 PPL 전문 회사 Unique Product Placement와 연간 5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어 영화와 TV에 자사 안경을 등장시키기로 합니다. 1983년에 개봉한 영화 <리스키 비즈니스> 속 톰 크루즈가 검은 웨이페어러를 썼고, 그해 웨이페어러 판매량은 360,000개로, 전년 대비 2,000% 폭증합니다. 80년대 후반 연간 300만~400만 개씩 팔아 치웠죠. 리스키 비즈니스 개봉 3년 뒤 <탑 건>에서 다시 톰 크루즈가 에이비에이터 모델을 쓰고 매버릭을 연기했고, 영화 개봉 후 7개월 동안 에이비에이터 판매가 40% 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레이밴의 부활은 단순히 PPL을 업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톰 크루즈가 영화 속에서 보여 준 무모하지만 매력적이고,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가 레이밴의 디자인과 통했기 때문이에요. 리스키 비즈니스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한 무모한 십대 캐릭터와 웨이페어러의 디자인은 서로를 강화했습니다. (웨이페어러의 사다리꼴 프레임은 당시 디자인 비평가에게 ‘불안정한 위험성’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더욱이 파일럿을 위해 시작한 브랜드의 에이베에이터 디자인과 탑 건 속 매버릭은 일맥상통하기도 했죠. 그만큼 브랜드와 영화 속 캐릭터가 맞물려 그 매력을 제대로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매버릭의 에이비에이터 / 자료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결국 반등에 성공한 레이밴은 브랜드의 본질과 디자인, 그리고 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시대상을 앞세워, 1999년 룩소티카 그룹에게 6억 4천만 달러에 인수 되었어요. 그리고 이 위기를 이겨낸 두 디자인, 에이비에이터와 웨이페어러은 변하지 않는 레이밴의 디자인 코어로 남아 있죠.
03 아삽으로 라키, 부탁드립니다
2025년 2월, 레이밴은 의미 있는 발표를 합니다. 힙합 아티스트 에이셉 라키(A$AP Rocky)를 브랜드 사상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어요. 1937년에 시작한 브랜드가 89년 동안 한 번도 두지 않았던 자리에, 첫 인물로 90년대생 래퍼를 앉혔습니다. 회장 레오나르도 마리아 델 베키오는 이러한 발표를 했어요. "우리는 전통적인 브랜드가 아니다. 한 번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둔 적이 없었기에, 첫 디렉터는 비전통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길 바랐다"
에이셉 라키와 레이밴의 만남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에이셉 라키는 패션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아티스트에요. 라프 시몬스, 게스, 구찌, 푸마, 보테가 베네타와의 협업 경력을 가지고 있고, 푸마와는 2023년부터 F1 멀티 이어(multi year) 파트너십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어요. 즉, 그는 같은 시기에 두 개의 글로벌 브랜드(레이밴, 푸마-F1)에서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음악, 패션, 가구, 연기, 그리고 본인이 운영하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AWGE까지, 활동 영역이 넓은 멀티 크리에이터이죠.
레이벤과 라키의 첫 결과물은 2025년 4월 발매된 'Blacked Out Collection'이었습니다. 레이밴의 Mega Icons 라인을 재해석한 이 컬렉션은 오버사이즈 실루엣과 골드 디테일, 새로운 울트라 다크 렌즈가 특징이에요. 동시에 라키는 더 과장된 형태의 Mega Wayfarer와 Wayfarer Puffer 같은 실험적인 디자인도 선보였습니다. 클래식 웨이페어러를 부풀리고 비틀어 거의 새로운 디자인처럼 느껴지게 만든 거죠.
경과 왕자님도 쓴 레이밴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1년이 지난 2026년 3월, 라키는 정반대 방향의 컬렉션을 내놓습니다. 얇은 메탈 프레임으로 만든 컬렉션이에요. 서론에서 언급한 GQ 기사 속 '작은 독서용 안경' 트렌드의 한가운데 있는 그 디자인이죠. 에이셉 라키는 래퍼 나스와 함께 등장한 캠페인에서 "아주 지적인 느낌, 아주 우아하다"라고 말했고, 나스는 "공부 잘하는 이미지가 난다"고 응수했습니다.
한 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1년 사이에 거대하게 부풀린 웨이페어러와 깃털처럼 가벼운 메탈 프레임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만들어 냈어요. 디렉터 개인의 취향 혹은 극단적인 실험이기보다는 레이밴이라는 브랜드가 받아 들일 수 있는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다는 뜻입니다. 90년 가까이 쌓아온 단단한 헤리티지가 코어가 되었기 때문에, 양쪽으로 디자인을 넓히더라도 ‘레이밴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AWGE와의 다양한 시도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04 이젠 PT할 때 안 떨어도 됨
레이밴의 흐름에서 극적인 변화는 모두 최근에 일어나고 있어요. 디자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웨어러블 AI 시대를 맞아 안경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거든요. 레이밴의 모회사 에실로룩소티카는 2019년부터 메타와 스마트글라스를 함께 개발해 왔습니다. 2021년 9월 1세대 'Ray-Ban Stories'가 나왔지만,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23년 2세대 'Ray-Ban Meta'부터예요. 카메라와 마이크, 스피커가 들어간 웨이페어러 실루엣이 SNS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중심으로 활용도가 극대화 되며, 시장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자동차에는 헤드업 디스플레이, 안경에는 메타 / 자료 출처 메타
에실로룩소티카는 2025년 한 해 동안 700만 대 이상의 AI 글래스를 판매했고, 이는 2023년과 2024년을 합친 200만 대의 세 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AI 글래스가 더 이상 실험적인 가젯이 아니라 일상 속 디바이스이자 콘텐츠를 만들 있는 툴로써의 활용이 증명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2025년 9월, 레이밴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시도합니다. 메타와 함께 'Ray-Ban Display'와 'Meta Neural Band'를 발표한 거예요. 가격은 글래스와 손목 밴드를 포함해 799달러부터 시작합니다. 이 제품의 특별함은 두 가지인데요. 첫째, 렌즈 안에 고해상도 풀컬러 디스플레이가 내장되어 메시지, 사진, 번역, 길 안내 같은 정보를 시야 안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Neural Band는 손목의 근전도(EMG) 신호를 읽어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을 디지털 명령으로 바꿉니다. 메타가 약 20만 명의 연구 참가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한 기술이에요. 글래스를 만지지 않고도 손 동작만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된 거죠.
외관상으로는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레이밴 메타 / 자료 출처 메타
2026년 1월 CES에서는 텔레 프롬프터 기능과 EMG 손글씨 입력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휴대폰의 노트나 구글 닥스에서 텍스트를 복사해 글래스에 붙여 넣으면, 발표나 영상 촬영 중에도 시선을 떼지 않고 대본을 따라갈 수 있어요. 그 결과 미국 시장 내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로의 국제 출시를 무기한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저커버그도 어딘가 스타일리시 해진 듯 / 자료 출처 메타
05 그 다음 주자는 제니
2026년 4월엔 블랙핑크 제니가 레이밴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발표됐습니다. 캠페인 이름은 'Styles for Unfiltered Confidence'. 90년대 랩 쉴드, 빈티지 메탈 프레임, 레트로 캣아이 실루엣을 착용한 이미지와 함께, Ray-Ban Meta Blayzer Optics 2세대가 동시에 공개됐어요. 가격은 379달러에서 499달러 사이. 레이밴은 과거 젠틀몬스터의 앰베서더였던 제니의 아이코닉함을 샀습니다.
레이밴에 갇힌 제니 / 자료 출처 레이밴
제니는 클래식 라인과 레이밴 메타(Ray-Ban Meta), 두 라인의 통합 앰배서더입니다. 클래식 레이밴 이미지는 제니의 아티스트 이름 'Ruby Jane'을 반영한 레드 톤으로, Ray-Ban Meta 이미지는 기술과 패션의 융합을 강조하는 블루 톤으로 촬영됐습니다.
이 앰배서더십은 레이밴 메타의 남은 숙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2025년 레이밴 메타는 700만 대라는 판매 실적을 냈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AI 안경을 쓰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에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제니에게는 레이밴 메타의 준비된 기술과 사람들의 일상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죠. 마치 톰 크루즈가 웨이페어러와 에이비에이터를 쓰고 스크린에 등장한 것처럼 말이죠.
유튜브는 이제 브랜드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무대로 자리 잡았습니다. 팬덤을 만드는 채널이 있고, 브랜드를 숨긴 채 오히려 더 크게 자라난 채널이 있고, 콘텐츠 자체가 비즈니스가 되는 채널도 있죠. 이번 시리즈는 그 무대 위에서 가장 가까이 움직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 비즈니스 인사이트 시리즈 : Youtube
✔️주제 : 브랜드를 키우는 유튜브 채널 운영 노하우 ✔️ 연사 : 주힘찬 채널피보터, 강석우 여기어때 BXP1팀 팀장, 백순도 토스 PD ✔️ 일시 : 5/21, 5/28, 6/4 (매주 목요일 오후 7:30 - 9:00) ✔️ 장소 : 비마이비 도산 스페이스(서울 강남구 언주로 727 트리스빌딩 2층) ✔️ 참가비 : 105,000원
지난 8년간 1,000여 개의 브랜드의 스토리를 발굴해 온 국내 최대 브랜드 커뮤니티, 비마이비. 비마이비는 하나의 브랜드를 깊이 다루거나, 하나의 주제를 넓게 다루며 브랜드를 큐레이션하고, 사람을 만나고, 매월 이달의브랜드를 선정합니다.

이번 주의 마이비레터에서는 89년 동안 얼굴 위에 머물러 온 브랜드, 레이밴을 브랜드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남성들이 쓰는 작은 독서용 안경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얇은 메탈 프레임에 투명 렌즈, 더 관능적인 경우엔 무테까지. 라이언 고슬링이 영화 〈프로젝트 헤일 메리〉에서, 티모시 샬라메가 〈마티 슈프림〉에서, 잭 할로우가 앨범 프로모션에서 모두 비슷한 안경을 썼습니다. GQ는 이 트렌드에 'SLRG(Slutty Little Reading Glasses)'라는 이름까지 붙였어요.
SLRG, 알지?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속 라이언 고슬링. 레이밴 아님 아님 아님 / 자료 출처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안경 스타일 하나가 시대의 무드를 드러내는 트렌드는 1900년대부터 계속 되어 왔어요. 1940년대의 거대한 티어드롭 에이비에이터, 1980년대의 두꺼운 검은 웨이페어러, 그리고 지금의 깃털 같은 메탈 프레임까지. 이를 이끌어 온 한 브랜드는 선글라스와 안경을 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 없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만들어 왔는데요. 그 주인공은 바로 레이밴입니다.
1937년 미군 조종사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89년이 지난 지금은 메타와 함께 AI 안경 시장의 1위에 올라 있는 브랜드. 단종 직전이던 브랜드를 톰 크루즈가 영화 한 편으로 단종 살려내는 우여곡절의 스토리도 있어요. 세대를 막론하고 선글라스의 근본으로 꼽히는 89살 브랜드. 이 브랜드가 시대를 타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01 광선, 아웃
레이밴을 직역하면 '광선을 막다(Ban Rays)'입니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가 브랜드의 네임에 담긴 셈이죠. 1929년, 미 육군 항공대의 존 매크리디 대령은 뉴욕 로체스터에 자리한 의료기기 제조사 보슈앤롬(Bausch & Lomb)에 항공 선글라스 개발을 의뢰합니다. 새로운 비행기들이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게 되면서 조종사들이 강한 햇빛으로 인한 두통과 고도병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하늘을 가르는 파일럿들에게 시야 확보는 곧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일상으로 들어온 초록색 렌즈 / 자료 출처 레이밴
보슈앤롬은 1936년 플라스틱 프레임에 녹색 렌즈를 더한 'Anti-Glare' 시제품을 만들었고, 1937년 일반 대중에게도 선보였습니다. 이듬해엔 메탈 프레임으로 재설계해 'Ray-Ban Aviator'라는 이름을 얻었죠. 이 안경이 시대의 헤리티지를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은 1944년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해변에 상륙하면서 레이밴 에이비에이터를 쓴 모습이 사진에 담겼고, 이 이미지는 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한 장면이자 시대의 표정이 되었어요.
브랜드가 헤리티지를 갖고 상징이 되는 일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곤 해요. 필요에 따라 태어난 발명품이 영광의 순간(혹은 셀럽의 일상)에 묻고, 대중이 그 영광과 셀럽에 대한 동경을 브랜드에 투영하는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시장에는 군용 잉여 레이밴 에이비에이터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그 안경과 자유와 승리를 동일시 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89년에 걸친 레이밴 브랜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어요.
레이밴의 아이콘들 / 자료 출처 레이밴
특히 우리나라에선 아시아인들의 얼굴형에도 잘 어울리는 에이비에이터 모델 자체는 ‘레이방’이라고 불리며 선글라스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87년 룩소티카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이래 에실로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신세계백화점을 비롯한 주요 백화점, 안경원 체인, 공식 온라인몰을 통해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어요.
02 매버릭의 ‘그’ 선글라스
1950년대와 60년대을 지나며 레이밴은 제임스 딘과 오드리 헵번의 인기까지 얻었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81년, 한 해동안 레이밴은 웨이페어러 모델을 단 18,000개밖에 팔지 못했고, 단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대에 뒤처진 디자인이 되어 가고 있던 거예요.
마이클 잭슨과 오드리 햅번도 쓴 레이밴 / 자료 출처 레이밴
레이밴은 필승 카드를 꺼냅니다. 캘리포니아 버뱅크의 PPL 전문 회사 Unique Product Placement와 연간 5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어 영화와 TV에 자사 안경을 등장시키기로 합니다. 1983년에 개봉한 영화 <리스키 비즈니스> 속 톰 크루즈가 검은 웨이페어러를 썼고, 그해 웨이페어러 판매량은 360,000개로, 전년 대비 2,000% 폭증합니다. 80년대 후반 연간 300만~400만 개씩 팔아 치웠죠. 리스키 비즈니스 개봉 3년 뒤 <탑 건>에서 다시 톰 크루즈가 에이비에이터 모델을 쓰고 매버릭을 연기했고, 영화 개봉 후 7개월 동안 에이비에이터 판매가 40% 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레이밴의 부활은 단순히 PPL을 업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톰 크루즈가 영화 속에서 보여 준 무모하지만 매력적이고,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가 레이밴의 디자인과 통했기 때문이에요. 리스키 비즈니스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한 무모한 십대 캐릭터와 웨이페어러의 디자인은 서로를 강화했습니다. (웨이페어러의 사다리꼴 프레임은 당시 디자인 비평가에게 ‘불안정한 위험성’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더욱이 파일럿을 위해 시작한 브랜드의 에이베에이터 디자인과 탑 건 속 매버릭은 일맥상통하기도 했죠. 그만큼 브랜드와 영화 속 캐릭터가 맞물려 그 매력을 제대로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매버릭의 에이비에이터 / 자료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결국 반등에 성공한 레이밴은 브랜드의 본질과 디자인, 그리고 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시대상을 앞세워, 1999년 룩소티카 그룹에게 6억 4천만 달러에 인수 되었어요. 그리고 이 위기를 이겨낸 두 디자인, 에이비에이터와 웨이페어러은 변하지 않는 레이밴의 디자인 코어로 남아 있죠.
03 아삽으로 라키, 부탁드립니다
2025년 2월, 레이밴은 의미 있는 발표를 합니다. 힙합 아티스트 에이셉 라키(A$AP Rocky)를 브랜드 사상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어요. 1937년에 시작한 브랜드가 89년 동안 한 번도 두지 않았던 자리에, 첫 인물로 90년대생 래퍼를 앉혔습니다. 회장 레오나르도 마리아 델 베키오는 이러한 발표를 했어요. "우리는 전통적인 브랜드가 아니다. 한 번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둔 적이 없었기에, 첫 디렉터는 비전통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길 바랐다"
에이셉 라키와 레이밴의 만남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에이셉 라키는 패션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아티스트에요. 라프 시몬스, 게스, 구찌, 푸마, 보테가 베네타와의 협업 경력을 가지고 있고, 푸마와는 2023년부터 F1 멀티 이어(multi year) 파트너십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어요. 즉, 그는 같은 시기에 두 개의 글로벌 브랜드(레이밴, 푸마-F1)에서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음악, 패션, 가구, 연기, 그리고 본인이 운영하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AWGE까지, 활동 영역이 넓은 멀티 크리에이터이죠.
레이벤과 라키의 첫 결과물은 2025년 4월 발매된 'Blacked Out Collection'이었습니다. 레이밴의 Mega Icons 라인을 재해석한 이 컬렉션은 오버사이즈 실루엣과 골드 디테일, 새로운 울트라 다크 렌즈가 특징이에요. 동시에 라키는 더 과장된 형태의 Mega Wayfarer와 Wayfarer Puffer 같은 실험적인 디자인도 선보였습니다. 클래식 웨이페어러를 부풀리고 비틀어 거의 새로운 디자인처럼 느껴지게 만든 거죠.
경과 왕자님도 쓴 레이밴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1년이 지난 2026년 3월, 라키는 정반대 방향의 컬렉션을 내놓습니다. 얇은 메탈 프레임으로 만든 컬렉션이에요. 서론에서 언급한 GQ 기사 속 '작은 독서용 안경' 트렌드의 한가운데 있는 그 디자인이죠. 에이셉 라키는 래퍼 나스와 함께 등장한 캠페인에서 "아주 지적인 느낌, 아주 우아하다"라고 말했고, 나스는 "공부 잘하는 이미지가 난다"고 응수했습니다.
한 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1년 사이에 거대하게 부풀린 웨이페어러와 깃털처럼 가벼운 메탈 프레임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만들어 냈어요. 디렉터 개인의 취향 혹은 극단적인 실험이기보다는 레이밴이라는 브랜드가 받아 들일 수 있는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다는 뜻입니다. 90년 가까이 쌓아온 단단한 헤리티지가 코어가 되었기 때문에, 양쪽으로 디자인을 넓히더라도 ‘레이밴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AWGE와의 다양한 시도 / 자료 출처 레이밴 인스타그램
04 이젠 PT할 때 안 떨어도 됨
레이밴의 흐름에서 극적인 변화는 모두 최근에 일어나고 있어요. 디자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웨어러블 AI 시대를 맞아 안경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고 있거든요. 레이밴의 모회사 에실로룩소티카는 2019년부터 메타와 스마트글라스를 함께 개발해 왔습니다. 2021년 9월 1세대 'Ray-Ban Stories'가 나왔지만,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23년 2세대 'Ray-Ban Meta'부터예요. 카메라와 마이크, 스피커가 들어간 웨이페어러 실루엣이 SNS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중심으로 활용도가 극대화 되며, 시장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자동차에는 헤드업 디스플레이, 안경에는 메타 / 자료 출처 메타
에실로룩소티카는 2025년 한 해 동안 700만 대 이상의 AI 글래스를 판매했고, 이는 2023년과 2024년을 합친 200만 대의 세 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AI 글래스가 더 이상 실험적인 가젯이 아니라 일상 속 디바이스이자 콘텐츠를 만들 있는 툴로써의 활용이 증명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2025년 9월, 레이밴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시도합니다. 메타와 함께 'Ray-Ban Display'와 'Meta Neural Band'를 발표한 거예요. 가격은 글래스와 손목 밴드를 포함해 799달러부터 시작합니다. 이 제품의 특별함은 두 가지인데요. 첫째, 렌즈 안에 고해상도 풀컬러 디스플레이가 내장되어 메시지, 사진, 번역, 길 안내 같은 정보를 시야 안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Neural Band는 손목의 근전도(EMG) 신호를 읽어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을 디지털 명령으로 바꿉니다. 메타가 약 20만 명의 연구 참가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한 기술이에요. 글래스를 만지지 않고도 손 동작만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된 거죠.
외관상으로는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레이밴 메타 / 자료 출처 메타
2026년 1월 CES에서는 텔레 프롬프터 기능과 EMG 손글씨 입력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휴대폰의 노트나 구글 닥스에서 텍스트를 복사해 글래스에 붙여 넣으면, 발표나 영상 촬영 중에도 시선을 떼지 않고 대본을 따라갈 수 있어요. 그 결과 미국 시장 내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로의 국제 출시를 무기한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저커버그도 어딘가 스타일리시 해진 듯 / 자료 출처 메타
05 그 다음 주자는 제니
2026년 4월엔 블랙핑크 제니가 레이밴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발표됐습니다. 캠페인 이름은 'Styles for Unfiltered Confidence'. 90년대 랩 쉴드, 빈티지 메탈 프레임, 레트로 캣아이 실루엣을 착용한 이미지와 함께, Ray-Ban Meta Blayzer Optics 2세대가 동시에 공개됐어요. 가격은 379달러에서 499달러 사이. 레이밴은 과거 젠틀몬스터의 앰베서더였던 제니의 아이코닉함을 샀습니다.
레이밴에 갇힌 제니 / 자료 출처 레이밴
제니는 클래식 라인과 레이밴 메타(Ray-Ban Meta), 두 라인의 통합 앰배서더입니다. 클래식 레이밴 이미지는 제니의 아티스트 이름 'Ruby Jane'을 반영한 레드 톤으로, Ray-Ban Meta 이미지는 기술과 패션의 융합을 강조하는 블루 톤으로 촬영됐습니다.
이 앰배서더십은 레이밴 메타의 남은 숙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2025년 레이밴 메타는 700만 대라는 판매 실적을 냈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AI 안경을 쓰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에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제니에게는 레이밴 메타의 준비된 기술과 사람들의 일상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죠. 마치 톰 크루즈가 웨이페어러와 에이비에이터를 쓰고 스크린에 등장한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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